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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잃어진 두 아들” (눅 15:11-31)

  • 김재득
  • 24.02.15
  • 87

누가복음 1511-31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5장 전반에 걸쳐 기록된 3가지 비유 중에 보통 탕자의 비유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이 말씀을 하시는데 왜 그리고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지를 우리가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는 151~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아멘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자가 누구인지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음을 이야기하며, 이에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를 생각했을 때는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두 계층이 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를 생각하면 매우 이색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 외에도 율법을 기초하여 수많은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한 사람들 혹은 그러한 직업을 가지는 사람을 죄인으로 이야기하였고, 그들은 정결법에 따라서 그들과 한자리에 있으려 하지도 않고 식사 교제도 엄격하게 금하였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수군거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불평하다의 뜻을 가지는데 즉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된 것 혹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대하여 불편해하며, 불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의 사회에서는 금기시하는 죄인들과 식사하는 행동을 예수님은 말씀에서 하고 계심과 동시에 그러한 자리에서 오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가지의 비유를 이야기하시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를 이야기하십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11절부터 기록된 탕자의 비유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먼저 살펴보면 한 사람의 가정을 이야기하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저 자신에게 돈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2117절에서 자녀들의 상속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자신의 분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러한 무례한 모습에도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나누어서 줍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다 모아서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그 재산을 낭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자기 재산이 다 떨어졌다는 것과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있는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선택은 이제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6절입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이제 그 아들은 들에 나가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불결한 짐승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부정하게 생각하는데 오늘 그 아들은 그 돼지를 치며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먹을 것이 없어서 쥐엄열매를 먹고 살아갑니다. 구주콩나무 열매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지역에 흔하게 자라는 나무로 콩처럼 생겨서 그 안에 열매가 맺히는 모습입니다. 쥐엄열매는 그 지역에서 보통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었고, 정말로 먹을 것이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랍비의 잠언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쥐엄 열매를 먹게 되는 날 그들은 뉘우칠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쥐엄열매는 가난함과 상황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오늘 둘째는 그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서글프고 처량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따듯한 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던 그 아들이 자신의 신세를 보니 차라리 아버지의 집에 품꾼으로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돌이켜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는 그러한 아들을 매일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직 집에 도착하지도 않고 저 멀리에 집이 보일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떠나보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그래서 매일 같이 집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였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멀리서 둘째 아들이 보이는 순간에 단번에 알아보고 그 아들을 따듯하게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둘째 아들은 당황합니다. 그리고 죄송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아들이라고 불러주시는 아버지 앞에 이제는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알맞지 않다는 의미로 이제는 자신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아들의 자격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서 그 어ᄄᅠᆫ것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저 품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함을 각오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힙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말처럼 그를 품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귀한 아들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가락지를 끼우고, 가락지는 그 사회에서 개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가락지를 아들의 손에 끼우는 것은 집안에서 여전히 아들로서 그 권리가 유효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발을 신기는데 당시의 종들은 맨발로 다녔기 때문에 신발은 신기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자신의 죄를 아버지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구할 때 아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들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아들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이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합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서 무슨 상황인지를 듣고는 곧이어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응당 큰아들의 분노는 당연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자신의 분노를 아버지에게 표현합니다.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 말씀에서 섬기다 표현하는 말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이 의무감을 가지고 그 삶을 살아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또한 자신의 상황과 동생의 상황을 비교합니다. 내게는 염소 새끼도 주지 않았으면서 저 둘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합니다. 질투하고 있으며 그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잣대로 동생을 정죄하며 아버지 역시 그 동생을 벌해야 한다고 그러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태도는 다릅니다. 첫째 아들과 같이 동생을 향해 분노하지도 않았으며,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첫째 아들을 통해서 너는 나와 함께 있으며,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왜 그것은 바라보지 못하는지 안타까워하며 지금은 떠나간 동생이 다시 돌아왔으니,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할 때임을 이야기 해줍니다.

이 비유는 지금 예수님 앞에 펼쳐진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불평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둘째 아들은 그 앞에 있는 세리와 죄인들을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습니다.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아버지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들인데, 그 두 아들 모두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 법을 떠나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첫째는 반대로 아버지와 같이 있기는 했으나 의무적이고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질투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첫째도 둘째도 모두 잃어진 아이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자기 잘못을 돌아보며 아버지 앞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기뻐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질투하며 정죄하는 첫째를 바라보며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첫째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내가 둘째 아들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보고자 노력했고, 때로는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향하여 서셔서 언제 돌아올지 손을 내미시며 기다리고 계시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임을 기억하고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첫째 아들의 자리에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눈에 우리보다 못하고 혹은 내가 보기에는 저 사람은 교회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저런 사람은 안 될 사람이야, 그러면 안 되지만 남을 정죄하고 비교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임을 기억하시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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